화려한 항쟁
그때 당신도 총을 들었을 겁니다
- 김지훈 감독 <화려한 휴가>를 보고
오랜만에 실컷 울었다.
손수건이 젖도록 울고 나니, 독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대도 꽤나 눈물이 많구먼' 하는 위안이 들었다. <화려한 휴가>는 그렇게 나를 울렸다. 극장 밖에서는 큰 비가 내리고 나는 극장 안에서 울었으니 동시상영 물바다인가.
아침부터 폭우가 내려서 등산을 포기한 토요일,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에 갔다.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와 심형래 감독의 <디워>를 모두 보기 위해서다. <디워>는 내가 하는 일과 연관이 있어 ‘직업적으로’ 봐 둬야 할 작품이라 선택한 것이다.
<디워>에 대해 나름대로 걱정이 많았다. 바보 ‘영구’로 널리 알려진 코미디언 출신의 감독이라서가 아니라, 한국영화의 현실 때문이었다.
한국영화 제작의 수급 개념으로 30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서 영화를 만들고, 수익을 올린다는 건 아주 위험한 모험이다. 기록적인 흥행으로 관객 1,000만명이 들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글로벌 소스를 택해 전 세계에 배급해서 수익을 올려야 하는데, 과연 그런 네트워크가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다행히 국제 영화시장을 이끄는 미국 배급회사가 참여하여 미국에서만 1,500개 스크린을 확보했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큰 성공이다. 왠 만큼 흥행까지 올린다면 글로벌 시장의 관문을 뚫은 첫 사례가 된다.
<디워>는 팔릴 만하다. 스토리가 약하다는 평이 많으나,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한 공상영화는 스토리보다 볼거리로 관객을 압도하는 게 최근 영화의 추세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국제시장을 노리는 SF영화일수록, 특정 민족이나 국가,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담기면 실패하기 쉽다. SF는 SF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적 이미지를 죽여야 산다.
관객을 생각해야 한다. 오락거리로 SF영화를 찾는 관객에게 골치 아프게 철학을, 민족을, 빈부격차를, 이라크전쟁을 요구한다 말인가. SF에서 스토리에 연연하는 평론가들의 좁은 눈이 우습다.
영화는 장르가 다양하다. 진지한 관객은 진지한 영화를 보면 되고, 예술적 감동을 찾는 관객은 아트무비를 고르면 된다. SF영화, 그 중에서도 괴수가 출몰하는 SF를 찾는 관객은 실감나는 볼거리를 우선한다. 괴수 SF의 고전이 되다시피 한 <쥬라기 공원>이 그렇지 않은가.
<디워>에 박수 치고, 심형래에게 박수 친다. 그보다 이런 ‘터무니없는 모험’을 감행하는 데 물적 토대를 제공한 쇼박스에 큰 박수를 친다. 망할 확률이 90%가 넘는 작품인데도 몇 백억 원을 투자하는 자본가에게 박수치지 않으면 영화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디워> 장사가 잘 되어서 쇼박스가 수천억원 대박이 나야 한국영화자본도 한국시장에서 주판알을 굴리는 좀팽이 짓에서 벗어난다. 겁 나는 길을 가는 도전 없이는 맨날 꼬붕 노릇이나 할 뿐이다.
이런, <화려한 휴가> 얘기를 한다는 게 옆길로 빠졌다. 80년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진압작전명이 ‘화려한 휴가’였다고 한다. ‘잔인한 도륙’이라고 이름 지어야 마땅할 양민 학살 작전을 그렇게 명명한 신군부 지휘부의 악마성에 치가 떨린다. 미친 놈들, 양민학살이 화려하다니....
영화는 권력찬탈에 눈이 먼 쿠데타 군의 무자비한 악마성에서 출발한다. 평온한 도시 광주를 한 순간에 피바다로 만들고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조준사격을 가하는 계엄군. 시민도 총으로 무장하고 시민군을 만들어 결사항전을 하지만 계엄군의 막강 화력에 쓰러지고 만다.
총과 탱크가 나온 뒤로는 민란이나 시민항쟁이 불가능하다. 옛날처럼 칼과 창으로 싸우던 시대에는 몰라도, 총과 탱크라는 현대적 살상무기를 독점한 군대를 상대로 돌맹이나 몽둥이를 들고 전투를 벌이는 건 개죽음을 자초할 뿐이다. 그런데도 광주시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렇게 했다.
악마들의 <화려한 휴가>를 압도하는 시민들의 <화려한 항쟁>이다. 시민군의 치열한 항쟁으로 계엄군을 도망치게 한 데서 사태는 정리 되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신군부의 악마성은 더욱 강화된다. 고립된 광주를 폭도와 간첩의 도시로 매도하면서 대규모 진압군으로 공격한다. 무차별 무력진압 외에는 그들이 택할 길이 없다.
죽음이 다가온다. 그러나 열흘의 항전 속에는 죽음만이 있는 게 아니다. 웃음이 있고 우정이 있고 사랑이 있고 이별이 있다. 그리고 악마의 발톱에 찢겨 죽을지언정 항복할 수 없다는 인간의지가 있다.
스케일이나 리얼리티에서 <화려한 휴가>는 크게 진보했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영상미를 떠나서 ‘왜 그들은 저항했는가’를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미덕만으로도 <화려한 휴가>를 만나러 극장을 찾아가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5월 27일 항쟁의 마지막 날, 계엄군의 도청진압이 진행되는 새벽, 광주 시내를 누비면서 외치는 박신애(이요원 분)의 울음 섞인 가두방송이 길게 가슴을 울린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광주 시민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국민이 기억해야 할 시민전사들의 최후이다.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는 이미 90년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 96년 장선우 감독의 <꽃잎>이 상영되었다. 어려운 여건에서 영상으로는 처음으로 시민항쟁의 정당성을 부활시킨 이정국 감독의 노력을 기억해야 한다.
<부활의 노래>는 광주의 들불야학 대학생 교사들이 항쟁의 선봉에 서고 죽음을 맞는 내용이다. 개봉관을 얻지 못해서 쩔쩔 매던 모습이 또렷이 떠오른다. 언제인가는 이 감독은 그의 <편지>처럼 아름답고 깊이 있는 영상으로 메니아들에게 찾아올 것이라 기대한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은 당시 개봉 직후 어느 일간지에 쓴 나의 영화평을 옮겨 싣는 것으로 대신한다.
[스크린 관람석18] 꽃잎
장선우 감독의 ‘5월 광주’ 해독법
개봉 첫날, 영화감상을 끝내고 출구를 향하다가 기둥 벽에 붙어 있는 메모판을 보았다. 영화사 측에서 관람객들에게 자유롭게 이 영화에 대한 촌평을 하라고 마련해준 것이었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메모판에 어지러이 적혀 있는 ‘느낌’의 내용들을 훑어보았다.
신인배우인 ‘이정현의 연기가 놀랍다’는 칭찬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가슴이 찢어진다’는 비통한 신음이었다. 배역의 중요성이나 연기의 몰입 정도를 볼 때 여고생 이정현은 신들린 새끼 무당이라고 할 만큼 끼가 있었다.
5.18 광주항쟁의 현장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을 피해 달아나다 넘어진 소녀(이정현 분)를 구하기 위해 엄마가 달려온다. 모녀의 손이 맞닿는 순간 총알이 엄마의 가슴을 뚫는다. 죽어가면서 자신의 손을 자물쇠처럼 그러쥔 엄마의 손을 뿌리치려고 소녀는 발버둥친다.
공포에 질린 소녀는 발로, 죽어가는 엄마의 팔을 짓눌러 손을 빼내고 도망친다. 다시 쓰러져 실신한 소녀는 다른 시체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가 어둠 속의 야산에 암매장당하기 직전에 탈출한다. 그리고 미쳐버린다.
영화는 미쳐 떠도는 소녀의 이야기이고 떠돌다가 만난 절름발이 공사장 인부 ‘장’(문성근 분)과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미친 소녀를 찾기 위해 역시 떠도는 4명의 ‘우리들’의 방황이 덧칠해져 있다. 그러므로 ‘가슴이 찢어진다’는 관객의 신음이 과장되었다고 할 수 없다. 엄마를 버리고 도망친 죄의식에 짓눌려 미친 소녀나 ‘핏빛 금남로’의 학살현장을 거의 실제상황에 가깝게 그려낸 장면들이 관객의 가슴을 찢게 만드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가슴 찢어짐의 양태는 같되, 그 심리적 기저는 확연히 다르다. 한 소녀의 참혹한 불행에 핀트를 맞추면 그것은 ‘슬픔’이고, 금남로의 무모한 학살에 초점을 맞추면 ‘분노’일 수밖에 없다.
장선우 감독은 슬픔을 컬러 필름에 담고 분노는 흑백 필름에 실었다. 그리고 슬픔과 분노가 일어나기 전, 철없고 꿈 많은 한 소녀의 행복했던 시절은 컬러 비디오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니까 컬러 비디오와 컬러 필름 사이에, 즉 행복과 슬픔 사이에 분노의 악몽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행복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슬픔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비극의 회로가 한 소녀의 몸을 관통하고 있고, 그 소녀는 경탄할 만한 솜씨로 가슴을 찢게 한다.
광주항쟁의 역사성을 한 개인의 악몽으로 축소했다는 평도 있으나, 그건 혀 짧은 투정이다. 5월 광주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서정적 구조의 ‘광주 읽기’를 택했다면, 오히려 더 장 감독은 분노보다 슬픔에 앵글을 맞췄어야 한다. 마음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리는 슬픔의 씻김굿이었으면 좀더 여운이 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